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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 리뷰

『내 이름은 빨강』 색과 사랑의 미로 속에서

by 현명한영애씨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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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과 권력 – 오스만 제국 속 예술가의 삶

16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술탄은 유럽식 그림법(특히 원근법과 인물 묘사)을 도입해 비밀스러운 서책 하나를 제작하려 한다. 하지만 이슬람 전통에서는 인간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림이 신의 창조 영역을 침범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경계에서, 화가들은 전통과 새로운 흐름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이 서책 작업을 맡은 미니어처 화가 집단 안에서 비극이 발생한다. 숙련된 화가 ‘은금’이 어느 날 우물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누가? 왜 지금?

이때 ‘검정’이라는 젊은 화가가 12년 만에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의 옛 사랑 ‘셰쿠레’를 다시 만나기 위해 돌아온 것이기도 하다. 셰쿠레는 남편이 전쟁터에서 사라진 뒤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며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다. 아버지는 바로 이 술탄의 서책 작업을 총괄하는 장인이다. 검정은 셰쿠레와 다시 가까워지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행방과 아버지의 권위, 또 다른 구혼자와의 문제로 쉽게 마음을 내보이지 않는다.

한편, 화가들 사이에서는 서서히 불신과 긴장이 싹튼다. 누군가 그림을 서양식으로 그리려 하고, 누군가는 전통을 지키려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살인이 발생한다. 검정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셰쿠레도 그를 도우며 점점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야기는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는 독특한 구조로 전개된다. 검정, 셰쿠레, 용의자인 세 화가, 심지어 죽은 자나 그림 속 인물, 색깔인 ‘빨강’까지도 자신의 시점에서 말을 건다. 덕분에 독자는 단순히 ‘누가 범인인가’를 넘어, 각 인물의 생각과 내면, 예술과 믿음, 사랑과 야망이 얽힌 복잡한 세계를 입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내 이름은 빨강 / 색과 사랑의 미로 속에서

 

🧩 다성적 시점과 추리의 묘미 – 『내 이름은 빨강』 줄거리 중심으로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다성적 서술이다. 살아 있는 인물은 물론, 살해된 시체, 개, 그림, 빨강이라는 색채조차도 서술자가 된다. 매 장마다 화자가 바뀌며, 독자는 사건의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시선을 경험한다. 이 방식은 단순히 독특한 구성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파묵은 이렇게 각자의 관점을 통해 진실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주요 인물은 젊은 화가 검정과 그의 옛 연인 셰쿠레, 그리고 살해된 일러스트레이터인 '은금'이다. 검정은 셰쿠레와 재회하면서도, 은밀히 그림의 범인을 추적한다. 이 과정은 미스터리 추리의 묘미를 주면서도, 인간 내면의 욕망과 예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특히 인상적인 문장은 “당신이 어떻게 보는지가 곧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준다”는 대사다. 이 문장은 이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가장 잘 압축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 『내 이름은 빨강』을 읽고 – 아름답고 복잡한 독서 경험

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이 알록달록했다. 단순한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오래된 미술관에서 작품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며 설명을 듣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추리하고 의심하고 연결짓는 과정이 꽤 몰입감을 줬다. 파묵은 독자를 단순히 관람객으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와 함께 예술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든다. 나는 한참을 멈춰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곱씹게 됐다.

사실 처음에는 낯선 지명과 인물 이름, 복잡한 시점 전환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며 오히려 그 복잡함이 주는 쾌감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책이 단순히 이국적이기만 한 소설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문제와도 연결되는 질문들을 던진다는 점이다. 표현의 자유, 진실의 상대성, 개인의 정체성 같은 주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 색채로 풀어낸 인간의 본질

처음엔 좀 어려웠다. 낯선 이름이 많고, 누가 누군지 헷갈리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 읽다 보니, 꼭 그림 속 작은 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기분이 들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 전체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시선들이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어울리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엮인다. 이 책에서는 빨강이라는 색조차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그런 구성 덕분에 색과 감정, 생각이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술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림을 어떻게 그리느냐보다, 그 그림 안에 담긴 감정과 욕망, 사랑과 외로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아직 예술이나 철학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걸까.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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