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동경의 선술집
저자: 다자이 오사무
출판사: 민음사
출간년도: 2006 (원작 초판: 1947)
🍶 어두운 시대 속 희망의 불빛, 『동경의 선술집』
『동경의 선술집』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피폐한 도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전쟁의 상흔이 사람들의 삶을 짓누르고, 가족을 잃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 곳곳에 넘쳐나는 시기. 이 소설은 그러한 시대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되, 거창한 정치적 사건이나 영웅적 인물이 아닌,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요시코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전쟁 중 남편까지 잃은 젊은 여성이다. 고난의 연속에도 그녀는 주저앉지 않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작은 선술집을 연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던 폐허 위에 다시 삶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요시코의 선술집은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이다. 화려한 간판도 없고, 인테리어도 소박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꾸 그곳에 모인다. 막노동을 마친 노동자, 조용히 술 한 잔에 위로받고 싶은 남성, 전쟁의 후유증으로 방황하는 예비군, 그리고 과거엔 학자였지만 이제는 아무도 찾지 않는 지식인까지. 그녀는 이 손님들에게 많은 말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술을 따르고,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선술집은 단순히 술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을 잠시 내려놓는 피난처가 된다.
이야기는 특별한 갈등 없이 잔잔하게 흐른다. 한 명 한 명 손님들의 이야기가 에피소드처럼 펼쳐지고, 그 속에서 각자의 상처와 슬픔, 그리고 아주 작지만 확실한 희망이 드러난다. 요시코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지만, 그녀의 존재는 소설 전체에 걸쳐 조용한 중심을 잡는다. 전후 혼란기에 오히려 더 도드라지는 건, 그 어떤 영웅보다도 이런 일상적이고 소박한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이처럼 특별한 사건이 없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약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몇 장을 넘기며 점점 그 미묘한 감정의 흐름에 빠져들게 된다. 나도 모르게 요시코의 눈으로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아픔에 살짝 마음이 젖어들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요시코가 만든 그 선술집에 나 역시 잠시 머물렀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인생이란 어쩌면 그런 선술집 하나에 기댈 수 있을 정도면 괜찮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 다자이 오사무의 문장, 그리고 따뜻한 냉소
다자이 오사무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과장하거나 감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슬픔을 내보이기보다 눌러 삼키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독자인 내가 더 크게 울컥하게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누구나,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 어딘가에 앉아 있고 싶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도 그런 장소가 있었나, 혹은 그런 장소가 되어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나는 요시코를 보며 ‘강한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강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이 소설은 버티는 사람, 흔들리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다자이의 인물들은 화려하지 않고, 조금 촌스럽고, 상처투성이지만, 그래서 더 정겹다. 그는 삶을 비관하면서도 동시에 포기하지 않는 묘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그게 다자이 작품의 매력이다.
🍶 나도 그런 ‘선술집’이 되고 싶다는 마음
책을 다 읽고 난 뒤,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마치 내 곁에 있다가 하나둘씩 떠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요시코처럼 누군가를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다. 누군가 “오늘 너무 힘들었어”라고 말하며 조용히 앉을 수 있는 공간, 말없이 있어도 괜찮은 마음, 그걸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이 책이 내게 전해준 건 그런 마음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란 매일매일의 ‘버팀’이 쌓인 결과라는 것. 그리고 그 버팀을 가능하게 해주는 건 꼭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온기, 한 잔의 술, 혹은 조용한 미소일 수 있다는 것. 『동경의 선술집』은 거대한 서사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사려 깊음과 다정함은 오래 남는다. 초보 독서가인 나에게 이 책은, ‘책을 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게 해준 따뜻한 시작이었다.
📌 결론 – 하루를 버티는 우리 모두의 선술집
『동경의 선술집』은 나처럼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잠깐 멈춰 선 사람에게 참 고마운 책이었다. 이렇다 할 큰 사건도 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오래 머문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재난을 겪은 뒤,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그게 딴 세상 이야기 같지 않았다. 요시코의 하루하루는 꼭 내 하루 같기도 했고, 그녀의 선술집에 앉아 있는 손님들 얼굴에서 내 주변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요즘 나도 사람을 만나면 자꾸 “힘들지 않으세요?”라는 말을 먼저 묻게 된다. 어쩌면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는 시대라 그런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잠시 앉아 쉬어갈 수 있는, 말없이 있어도 괜찮은 공간이 되어줄 수 있을까. 꼭 거창한 위로나 정답이 아니어도, 그냥 그런 ‘존재’ 자체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요시코처럼 상처가 많고, 사연도 깊지만, 누군가를 환대할 줄 아는 사람.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경의 선술집』은 단지 소설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떠올리게 한 한 권의 거울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괜히 마음 한 켠이 따뜻하다. 책 한 권이 이렇게 사람 마음을 다독여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사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압박보다 그저 오늘 하루를 잘 버티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고요하고, 따뜻하고, 다정한 이 소설은 그 자체로 한 잔 술 같고, 지친 몸을 기댈 수 있는 밤의 안식처 같다.